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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친코 2

소설을 많이 읽은 사람이 공감 능력이 좋다고 한다. 어렸을 때 소설 좀 읽을 걸 그랬다. 남한테 나를 잘 대입할 수 있는 사람은 이해의 폭이 넓다. 소위 말하는 그릇이 크다는 뜻이다. 시험 한문제 더 맞는 것보다 소설책 한 권을 더 읽는 것이 인생에 훨씬 더 큰 도움이 되는데.
모든 좋은 것들은 오랜 시간에 걸쳐 일어난다. 좋은 몸을 가지려면 오랜 시간 운동해야 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려면 좋은 재료를 구하고 손질하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한다. 내 감정에 대한 처리, 공감 능력도 이와 같아서 오랜 시간 훈련을 해야 한다. 그런데 한 사람이 여러 인생을 살 수는 없는 지라, 우리는 소설을 통해 여러 종류의 삶에, 그 때 그 시간의 그 감정에 나를 대입하면서 감정 근육을 키운다.
그래서 때로 좋은 소설이라는 것들은 불쾌하고 피하고픈 감정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순자와 그 주변인의 삶도 답답하고 갑갑하다.
기술의 발전 방향과 훌륭한 삶을 살기 위한 방향은, 조금 먼것이 아닌가 한다. 기술은 더 짧은 시간 동안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게 하기 위해 몸부림친다. 하지만 훌륭한 삶을 살기 위해 필요한 것은, 분초 단위의 생산성 향상이 아니라 더 긴 시간으로 삶을 정의하는 것이다. 1년, 5년, 10년의 긴 시간 단위로 삶을 바라봐야 하는데, 참 어렵다. 그래서 훌륭한 삶이 귀한 것이고.
삶은 긴 시간에 걸쳐있다. 내가 삶을 여러번 살 수는 없으니, 다른 사람의 삶을 소설을 통해 경험한다. 오랜 시간에 걸친 운동으로 근육이 커지듯이, 그렇게 오랜 시간 읽어야 다른 사람에 대한 이해의 폭이, ‘삶’이라는 시간 단위에 대한 이해가 겨우겨우 넓어진다.
소설을 더 많이 읽어야겠다.
긴 시간에 대한 이해를 ‘덧없음’으로 정리하지는 않았으면 한다. ‘덧없음’ 대신 내가 좋아하는 단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에 대한 애정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