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세개인 나라에서는 눈이 두개인 사람이 비정상이라고 했다. 실제 눈은 두개이지만, 눈이 더 많으면 산술적으로 좋다는 이유로 눈 하나를 더 그리고 다니는 것이 더 정상인 세상이 되어버린 것 같다. 언론의 본래 목적은 정보 전달이었을 테다. 인류 역사의 오랜 기간 동안, 정보는 권력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눈물로 권력은 민중에게 돌아갔다. 언론은 이를 가능하게 하고, 지속하게 한 주연이다.
주연이었다. 격변하는 기술과 광고라는 수익원 사이에서 언론은 본래 목적을 잃고 있다. 언론만의 문제는 아니다. 머리가 꼬리를 흔들거나, 눈이 세개인 사람이 목소리가 큰 곳은 어디에나 있다. 기술의 본래 목적은 생산성 향상이었을 테다. 더 많은 사람들이 높은 생산성이 낳은 잉여 시간으로 더 큰 행복을 추구하기를 바랐다. 일부는 사실이다. 하지만 반대로 기술은 일종의 권력이 되어 모두의 생산성이 아닌 극히 소수의 부를 추구하는 도구로 동작하고 있다.
리스크(위험) 관리는 이루고자 하는 일을 계속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한 보조 수단이었을 테다. 관리할 수 있는 위험이 있다면, 이를 미리 준비해서 실제 위험이 발생했을 때의 피해를 줄일 수 있다. 하지만 어느샌가 꼬리가 머리가 되었다. 리스크는 피하고 없애야 하는 것이 되었고, 누군가가 꿈을 꾼다는 것은 위험관리도 모르는 사람의 바보같은 이야기가 되었다. 최대한 남들과 비슷한 꿈을 꾸고, 일자로 줄지어서서 앞사람을 어떻게든 제끼는 것이 위험 관리를 잘하는 사람의 성공 비법이다.
눈이 세개인 나라에 살다보니, 문제를 문제라 이야기하고, 이루고 싶은 꿈을 이야기하는 것이 쉽지 않다. 문제를 문제라 이야기하면 그래서 해답이 뭐냐는 질문이 돌아온다. 이루고 싶은 꿈을 이야기하면 그 일이 실패할 수만 가지 이유가 돌아온다. 모두 정답을 모르는, 실패하는 위험이 무섭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이런 글과 어른이 귀하다. 우리가 지금 가진 문제가 무엇인지 말하고 가슴뛰는 일을 향해 움직이는 저자가 좋았다.
기술은 더 많은 사람의 생산성을 향상시킬 수 있다. 어쩌면, 지금 부족한 것은 더 나은 기술이 아니라 더 넓은 마음일지도 모른다. 언론은 더 많은 사람들에게 더 정확한 이야기를 전달함으로써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 수 있다. 어쩌면, 언론이 노력해야 할 것은 ‘더 많은 사람에게'가 아니라 '더 정확한' 이야기일 지도 모른다. 아니, 조금 더 정확하게는 누군가의 ‘신뢰'를 되찾아야 한다.
기술의 발전으로부터 소외되어 가는 사람들을 돕는 서비스를 통해 그들의 삶을 더 나은 것으로 만들 수 있도록 돕고, 이를 통해 그들의 신뢰를 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