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스북을 통해, 유튜브를 통해, 트위터를 통해 세상의 온갖 소식을 실시간으로 접할 수 있다. 핸드폰 카메라로 찍은 영상들은 마치 그 일이 내 방에서 일어나는 듯한 느낌을 준다. 기승전결로 잘 정리된 일련의 '문제 해결 기록'은 내가 그 문제를 해결한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내가 서 있는 곳과 스크린을 통해 보이는 곳 사이에는 항상 큰 틈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누적된 분노와 슬픔이 커다란 움직임으로 나타날 때가 있다. 여성들의 분노가 그러했고, 요즈음 흑인들의 분노가 그렇다. 인터넷이라는 창은 당사자들의 분노와 슬픔과 회한이 뒤섞인 그 감정을 전달하지 못한다. 아직 우리는 그 정도까지 발전하지 못했다. 그러니 우리는 항상 거기에 커다란 틈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틈이 있다는 것을 항상 기억하는 사람이고 싶다. 틈을 잊은 채 함부로 말하는 사람이 아니어야 한다. 그래도 폭력은 용납할 수 없다느니(당신은 사회의 용납을 대변할 수 없다), 저러니 그렇지라는 둥(인과 관계가 틀렸다)의 이야기는 틈을 잊은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이다.
무슨 문제든 쉬워졌다. 코딩은 이렇게 배우면 되고, 사업 초기 고객 모집의 문제는 저렇게 해결하면 된다. 조직이 커질 때는 새로운 조직에 걸맞는 좋은 사람을 데려오면 되고, 모든 product 는 고객에게 집중하면 성공할 수 있다. 유일한 문제가 있다면, 인터넷에서 찾은 그 해결책은 동작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 뿐이다. 쉬워진 것은 문제가 아니라 단편적인 해결책에 대한 접근이다. 모든 문제는 자신만의 문맥을 가지고 있고, 사람들은 자신의 문맥과 실패담은 잘 공유하지 않는다.
인터넷을 끊어야 한다거나 자기 표현을 줄여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인터넷은 잠시 끊을 수 있다면 끊는 것이 좋을 것 같긴 하다). 인터넷이 없었다면, 수많은 소수의 목소리들이 지금보다 공허하게 사라져 갔을 테다. 인터넷이 없었다면,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어 답답할 때 선배들은 어떻게 했는 지 알지 못한 채 꿈을 포기해야 했을 테다. 다만, 항상 나와 어떤 사건 사이에는 꽤나 깊고도 넓은 틈이 있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겠다.